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포르피리오 디아스]]처럼 인디오와 크리오요의 혼혈이며, 경력도 디아스를 닯아서 일찍이 사관생도부터 군생활을 시작해 [[멕시코 혁명]]이 일어날 무렵에는 육군 소장까지 진급했다. 이 때 멕시코는 디아스가 퇴진하면서 대통령이 된 [[프란시스코 마데로]]가 전후 처리에 실패하면서 혼란스러웠는데, 우에르타는 반란을 일으킨 혁명군 출신 군벌인 파스쿠알 오로스코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다.[* 이 때 [[판초 비야]]가 우에르타 휘하에 배속됐는데, 평소에 그를 싫어하던 우에르타에게 총살당할 뻔 했다.] 1913년 2월에 마누엘 몬드라곤[* [[몬드라곤 소총]]을 개발한 장군.]과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, 우에르타는 마데로에게 진압 명령을 받자 몬드라곤과 내통하고 쿠데타를 도운 뒤 마데로를 암살했는데 이 사건이 비극의 열흘(La Decena Trágica)이다. 이후 우에르타는 징검다리로 세운 임시 대통령인 [[페드로 라스쿠라인]][* 임기가 단 '''45분'''이다.]에게 승계받는 방법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. 대통령이 된 우에르타는 디아스 시대로의 회귀를 국정 운영 방침으로 잡고, 전국에 퍼진 반란군을 진압하겠다는 명목으로 강제 징집령을 내렸으나 이 정책들로 인해 민심을 잃게 된다. 국외 정세도 우에르타의 편이 아니었다. 우에르타는 취임 후 영국과 독일의 승인을 받았지만, 미국은 승인을 미루었다. 그러던 중 1914년에 미 해군 함정인 돌핀 함이 연료를 긴급히 보충하러 탐피코 항에 입항했다가 멕시코 경찰에 억류된 탐피코 사태가 일어나자, 미국은 베라크루스를 일시 점령했고 우에르타를 지지하던 헨리 윌슨 주멕대사도 본국으로 송환했다. 결국 [[베누스티아노 카란사]]를 맹주로 결집한 혁명군이 총공격을 개시하자, 우에르타는 스페인으로 도주한 뒤 독일의 지원을 받아 복귀를 노렸으나 미국에게 멕시코 입국이 거부되자 엘패소에 발이 묶인 채 1916년에 사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